★출간

사두봉 신화 / 진을주 연작시집 (전자책)

한국문학방송티스토리 2024. 6. 2.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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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봉 신화 
진을주 연작시집 (전자책) / 한국문학방송 刊 


  詩는 인간의 元型을 그리는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원형이란 자연을 말함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詩랍시고 언어에 매달리며 밤을 지새워도 그 자연 그 인간의 원형이 나타나 준 일은 없다.
  그러나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지하철 속에서 또는 종로나 퇴근길의 인파에 밀려가면서 아니면 매정한 타인들의 사나운 말소리를 들으면서도 문득문득 고향의 사두봉 능선이 마음속에 어른거리고, 그 사두봉 능선과 더불어 뭔가 친밀해지고 싶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이따금 그러한 나를 부정적으로 회의해 보기도 한다.
  현실의 패배자라기보다도 너무 과거에 사로잡히기 쉬운 내가 보기 싫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은 얼마만큼 현실적일 수 있고, 얼마만큼 과거적인가, 도대체 사람을 사람답게 움직이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추구해 보고 싶은 것은 나만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쫓고 쫓기며 바쁘게 주어진 삶의 일정을 채워나가고 있지만, 결코 누구도 그러한 현실에 스스로의 살아있는 모습을 내던지고 녹여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자연을 노래한다면서 곧잘 고향의 산천을 그린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대상화할 수 없는 우리 스스로의 구체적인 실체이고, 고향의 산천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어려 있는 무늬이자 살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좀더 친밀하고 좀더 자상한 나의 자연을 찾고 싶어졌다.
  고향의 산천도 그려봤고 노래해 왔지만, 그것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나의 고향은 아닌 것 같다.
고향이 그리워 고향을 찾을 때마다 늘 실망하고 오히려 마음의 고향을 잃은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듯이, 고향의 산천을 그리면 그릴수록 고향과 나의 자연은 멀어만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두봉 신화를 찾기 시작한 것은 1983년의 시집 『슬픈 눈짓』을 출간하면서였고, 그러한 나의 새로운 마음의 행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시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고향 의식은 어디까지나 몸에 젖은 말, 마음을 저리게 하는 나 스스로의 고향의 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비롯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詩라고 하는 언어 표현은 적어도 의미 전달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언어의 본질까지도 때로 무시하고 뛰어넘으면서까지 초인간적인 세계와의 교감을 기구하는 생명의 제의적祭儀的 발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우리는 분명히 문명을 구가하면서 생활의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 과학 문명에서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향수할 수 없고, 생명 그 자체가 과학 이상의 진실을 요구하는 이상 詩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가치 표현일지도 모른다.
  詩라고 하는 이 한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그대로 言과 寺의 구조적인 만남 자체가 이미 말의 제의祭儀를 뜻하고 있는 것이지만, 현대사는 확실히 갈수록 미묘하게도 시만이 거의 유일하게 문명으로부터 인간의 실존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문명에서 제의형식祭儀形式이자 인간의 내적 열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보는 눈에 따라서는 나의 이 사두봉 신화 속의 시편들을 실없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샤머니즘의 넋두리로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시에 눈이 뜨이기 시작한 대학 시절부터 결국 시란 언어를 초월한 인간 존재의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고, 神 지피지 않고서는 그러니까 신명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언어도 존재의 의의가 없는 인간의 정신적인 지향성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적 정신의 자유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생명감을 얻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도 주장하고 싶은 나의 시관詩觀이요, 인간관이다.
  실상 같은 언어 활동이면서도 시적 언어를 다른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언어 활동과 동일시하는 가치의 혼동은 아직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시적 언어를 합리적인 언어 활동의 한 가지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도 현대 문화의 일반적인 성향이 아닐까 여겨진다.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적신관三位一體的神觀’이나 ‘성찬聖餐 미사’ 등의 제의형식祭儀形式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어째서 그러한 신화적神話的인 제의내용提議內容들은 합리적으로 현대 문화가 거리낌없이 수용하는데, 유독 우리의 민족적인 신화들은 한결같이 샤머니즘으로 낙인을 찍고 배척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는 詩라고 하는 문학예술의 한 장르로서, 또 후자들은 종교 신앙이라는 특전에 있어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의 민족적인 신화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가혹하게 학대받아야 하는가.
  물론 사두봉 신화는 우리의 민족 신화를 대표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두봉 신화는 분명히 우리 민족 신화가 갖는 본질적 요소를 거의 빠짐없이 갖추고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삶의 지혜가 되어오고 있듯이 사두봉 신화는 그 민족 신화의 내용과 형식의 모든 면에 있어서 내 고장의 삶의 생산적인 지혜가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어떤 종교에 못지않게 사두봉 신화는 긴 역사의 우여곡절을 통해서 내 고향의 삶을 지켜보고, 삶의 의지와 슬기를 불어넣으며 무엇보다도 친밀하고 유익한 가치로서 벗이자 스승이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두봉 신화의 한 권 시집은 단순한 고향 의식의 산물도 아니요, 또한 샤머니즘에 대한 예찬이거나 복고적인 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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